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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정유산

고암서원 묘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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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서원 묘정비

  • 종목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 지정일1984년 04월 01일
  • 규모1 기
  • 시대조선 영조 23년(1747년)
  • 소재지정읍시 모촌길 48-17 (하모동)

상세정보

조선조(朝鮮朝) 숙종(肅宗) 15년인 1689년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정읍(井邑)에서 수명(受命: 賜藥)한 후 6년이 지나서 무고(誣告)함이 밝혀져 나주(羅州) 유생(儒生) 나세기(羅世器) 등 팔백여명(八百余名)의 상소(上疏)로 숙종(肅宗) 21년(乙亥)인 1695년 6월에 창건(創建)하고 그해 9월에 고암(考巖)이라 사액(賜額)하였다.
그리고 정조(正祖) 9년(乙巳)인 1785년 10월에 민치겸(閔致謙) 등 유림(儒林)들의 상소 (上疏)로 우암(尤庵) 선생의 수제자인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를 배향(配享)하였다. 이 두분의 영정(影幀)이 봉안(奉安)되었다.

당시의 서원에서는 장의(掌議) 1명 재임(齋任) 2명 원생(院生)이 내외 60명이 였다.
고종(高宗) 7년(庚午)인 1870년에 정부(政府)의 령(令)에 의하여 헐리웠는데 그 전날 밤 에는 동네의 닭들이 초저녁부터 울어대고 마을의 샘물이 말랐다고 한다.
그 때에 건립한 묘정비(廟廷碑)가 남아 있다.
이 묘정비(廟廷碑)는 영조(英祖) 23년인 1747년(丁卯)에 건립하였는데 이재찬(李縡撰)이 지은 비문(碑文)이다. 그 유허(遺墟)에 세워져 있는 비(碑)는 귀부(龜趺: 거북이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 위에 세워 있다.

정주시(井州市)에서 원우(院宇)를 1991년에 시장(市長) 조명근(趙明根)이 시비(市費) 4천 만원으로 사우(祠宇) 11평에 세칸(三間)을 세우고 그 주변을 정비하였으며, 1992년에 강당 (講堂)을 새로 지었고 1993년에는 외삼문(外三門) 등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암서원(考巖書院)이 제사(祭祀) 지내는 주벽(主壁)은 송시열(宋時烈)이며, 배향(配享) 은 권상하(權尙夏)이다.

제사는 매년 9월 초정(初丁)에 지낸다.
서원(書院)의 규모(規模)와 사우(祠宇)는 한동(一棟)이며 맞배지붕에 동쪽으로 향하고 있 다. 강당(講堂)은 한동(一棟)으로 맞배지붕으로 동향으로 있으며, 내삼문(內三門) 한동(一棟)은 역시 맞배지붕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다.

제사(祭祀) 받는 사람

송시열(宋時烈)

이조 중기(中期)의 학자이며, 명신(名臣)이다.
은진인(恩津人)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성뢰(聖賚)였고 자(字)는 영보(英甫)이고 호(號)는 우암(尤庵)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1607년인 선조(宣祖) 40년(丁未)에 충남 옥천 구룡촌(忠南 沃川 九龍村)에서 수옹(睡翁) 갑조(甲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제자로 인조(仁祖) 11년(癸酉)인 1633년에 사마시(司馬試) 에 일등으로 합격하고 경능참봉(敬陵參奉)이 되었다.
이어서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에 孝宗)의 스승이 되니 크게 출제할 인연은 이 때에 맺은 것이다.

효종(孝宗)이 임금이 된 뒤에 벼슬에 나아가 이조판서(吏曹判書), 좌찬성(左贊成)을 지내 고 현종(顯宗) 2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주자학(朱子學)의 거유(巨儒)이다. 현종(顯宗) 15년(甲寅)인 1674년에 원자(元子)를 책봉하는 문제로 예론(禮論)의 시비(是非)가 되어 제주도(濟州道)로 유배(流配)되었다가 국문(鞠問)을 받기 위하여 다시 서울로 압송(押送) 도중에 이해 6월 7일 정읍(井邑)에서 사약이 내렸다.

제자 권상하(權尙夏), 김만준(金萬埈)의 손을 붙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약을 마시고 세상 을 떠나니, 다음 날인 8월에 최후(最後)를 마쳤으니, 그를 수원(水原)에 장사 지냈다.
그 때가 1689년(己巳)으로 숙종(肅宗) 15년이며 우암(尤庵)의 나이 여든세살 이다.
그 후 5년만에 조정(朝廷)에서 관작(官爵)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다.
도봉서원(道峰書院)과 문정서원(文正書院)에 그를 모셨다.

귀양살이의 어려운 가운데에도 저술에 힘?고 학문에 열중하여 제자를 가르쳤다.
저서(著書)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어류소분(語類小分),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 문집(文集) 등이 있다.

권상하(權尙夏)

숙종(肅宗) 때의 학자이며, 안동인(安東인) 이다.
자(字)는 치도(致道)이고, 호(號)는 수암(遂庵) 또는 한수재(寒水齋)이다.
시호(諡號)는 문순(文純)이다.
집의(執議)를 한 격(格)의 아들로 1641년인 인조 19년(辛巳)에 한양(漢陽) 동현(銅峴)에 서 태어 났다.

스물 한 살 때 진사(進士)에 합격했으며, 일찍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배워 그의 총애를 받 았으며, 주자학(朱子學)으로 촉망을 받았다.
숙종(肅宗)께서 송시열의 무고(誣告)함을 밝힌 뒤 여러차례 관직을 내리고 불었으나, 나 가지 않았다.
송시열의 뜻을 받들어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고 명(明)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모시었다.

다시 왕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大報壇)을 쌓고 전기 두 왕을 제사(祭祀)하였다.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 벼슬을 주었으나, 다 사양하였다.
경종(景宗) 1년(辛丑)인 1721년에 세상을 떠났다.

고암서원 묘정비문(考巖書院廟庭碑文)

肅宗 己巳에 尤庵선생이 濟州로부터 잡아 오라는 命을 입고, 이 고을에 이르러 後命한지 가 이제 五十餘에 學士大夫가 이 땅에 이르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려 참아 가지를 못하니, 슬프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것이가 대개 하늘이 大賢을 내신 것은 우리 道를 위 한 것이요 生民을 위한 것이다.

선생은 孝宗 年間에 미쳐 몸에 天下大義를 맡았으나, 이에 中道에 임금이 죽음을 술퍼하 고 일을 가히 할수 없게되니, 드디어 이에 생각을 거두고 오히려 忠謹을 힘써 세상을 잊지 아니하고 써 天理를 밝히고 人心을 바르게 함을 몸의 責任을 삼아 先聖의 道를 근심하고 異端의 說을 배척하니 실로 孟子朱子後 한 사람이다.
이 義理를 잡아 밝히여 큰 禍가 앞에 있음을 알고도 돌아보지 않으니, 群凶이 서로 선동 하여 中殿이 폐출됨에 그 禍가 先生에게 미쳤다.

文谷墓銘이 絶筆이다. 그 詩에 이르기를 죽는 것이 영화 할 때가 있다는 것은 잘못 또한 先生 스스로를 이른 것이다. 先生 비록 一時의 禍이거니, 이같이 하늘의 道와 땅의 義를 終始에 다 하지 아니하니, 이 道를 돌이키면 邪가 아니면 逆이다.
우리 東方에 한 地域으로 하여금 君臣父子의 人倫을 알게하고 夷狄(이적)과 禽獸에 돌아 감을 면한 바다 先生이 주심이다.
아! 아! 장하도다.

先生 諱는 時烈이요. 字는 英甫니 恩津人이다. 宣祖 丁未에 출생하여 孝宗 처음 정사에 禮를 다하여 召貧하니 벼슬은 左議政에 이르고 벼슬을 사양 하였다.
禍作後 六年에 임금이 크게 잘못을 뉘우치고 中殿을 復位하고 先生의 벼슬을 回復하며, 祭文을 주며, 또 文正公이란 諡號를 주니 遺澤이 끼친바 아울러 祠堂을 세워 考巖에서 享祀 하니 章甫가 主唱하여 장차 朝廷에 碑를 세울세 縡(재)에게 蜀文(촉문)을 하여 대략 本末志業을 右와 같이 짓노라.
資憲大夫 議政府左參贊 兼 知經 事 世子右
賓客 李 縡 記

考巖書院廟庭碑文

肅宗己巳 尤庵宋先生 自耽羅被掌 命至此縣而受後 命至今五十有餘年而 學士大夫 此地者 莫不齋資涕淚而不忍去 鳴呼是執使之然哉 天生大賢爲吾道也. 衛生民也 先生際屬寧陵身任 天下之大義 乃夫中道泣弓事無可爲則 遂乃券而懷之 猶 不忘於世 以明天理正人心爲己 責閔先聖之道 異端之說 實孟朱後一人 執此義理雖明知大禍在前而 不乏顧以至群凶 交煽 極垂傾而 先生其及於禍矣 文谷墓銘 先生絶筆而其詩曰 死有榮時 亦先生自道也 先生雖禍於一時 若是天經地義終始盡滅 他不得反是道也者 非邪則逆也 鳴呼盛矣 先生諱時字英甫 恩津之人 萬曆丁未生 孝 조初腹盡禮賓召官之左議政 致仕 致仕禍作後六年 上大悔悟 位重正復先爵 賜祭又賜鎰文正 遺澤所 倂設祠 以亨考巖卽其一也 章甫倡義將立碑於廟庭 屬縡爲文器敍本末 志榮如此云


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 兼 知經筵事世子右
賓客 李 縡 記

朝奉大夫司憲府持平 閔 屬 洙 書
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 中樞府事 兪 拓 基
崇禎甲申後百四年丁卯二月 日 (英祖 二十三年)

* 碑 : 花崗石 龜趺座臺 平冠
* 高 : 195㎝, 幅 78㎝, 厚 19㎝

고암서원복원 서적비문

井邑 茅村(모촌)의 고암서원은 大老 文正公 尤巖先生을 俎豆하는 곳이다.
대개 선생이 大賢의 자태로 誕生하니 정기를 받아 孔子, 朱子의 道를 으뜸으로 하고 栗谷, 沙溪의 傳統을 이어서 그 學問 造詣와 大節雄文이 하나도 不足함이 없어 儒門에 泰山과 北斗요 廟堂에는 높은 이니 실로 우리 東方에 은혜가 無窮하다.
肅宗 己巳에 미처 不幸이 群凶이 誣陷한바 이미 濟州가서 울타리로 둘러 安置되었다가 돌 아오는 길에 정읍에서 受命을 한지 六年 後 甲戌에 國政이 다시 새로워서 伸寃復宮하고 고 암서원을 창건하여 御筆四大字로 현판을 하니 各處院亨이 이로 因하여 조짐이 되었으니 考巖은 여기가 宋子의 으뜸 書院이고 큰 書院이다.

正祖 乙巳에, 首弟子 遂菴을 權先生을 配享하였다. 高宗 初年에 大同毁撤에 섞어 들어감 을 면하지 못하여 적막하고 荒廢하여 두 甲을 지냈다. 後學의 아픔과 한이 쌓였으니, 어찌 하겠는가 다행히도 天道가 좋게 돌아옴에 文運이 곧 돌아와서 光復後 己巳, 庚午, 辛未, 壬申, 癸酉 五年間에 公議로 復設을 꾀하여 즐거이 誠金을 내고, 井州市長 趙明根, 道議員 鞠承 , 井州市長 李淀圭가, 慕賢의 정성이 간절하여 本院 三間, 講堂 四間, 神門 三間이 빛 이 나고 우? 솟아 耳目이 새롭고 奉碑禮成하니, 宿願이 비로소 펴지고 士氣가 더욱 확대 되었다.

그러나 무릇 遠近儒生이 여기를 出入하는 者는 이에 自滿으로 써 말고 春秋享祀와 朔望焚香의 誠實을 모으며, 精神을 모우고 意志를 힘쓰며, 氣運을 奮發하여 先生의 큰 文集을 읽 고 선생의 春秋를 講하여 가슴에 간직하여 잃어 버리지 말고 몸을 맑게 하고 德에 나아가 기필코 天理를 밝히고 人心을 바르게 함의 遺旨를 떨어뜨리지 아니 하면 바야흐로 가히 先生의 무리라 이르고 今日 復設의 本意이다.
힘쓸지어다.

이 역사는 井邑鄕校로부터 주장하니 四方에서 互應하고 나 또한 金友 仁煥과 安永敦으로 더불어 始終專力하여 風波를 지내며 辛苦를 겪고 功을 告하였다. 이에 酩에 이르기를 考亭 의 後嚴句는 朱子 宋子 道銑을 크고 깊이 刻했다, 옛적부터 公論이 오래 이미 定하니 後人 은 감히 疑惑을 내지말라. 宗廟百官이 풍부하고 아름다우니, 論著發揮함이 세상에 대적할 수 없네. 廢墟에다 重建함에 感想이 많으니 굳게 유지하여 千億年토록 뻗쳐라.


本院建立 三百四十年 癸酉 九月 日
後學 扶安 金 炯 觀 謹撰
後學 慶州 金 權 鎭 謹書

考巖書院復元事績碑

禁城茅川之考巖書院은 大老文正公尤翁宋先生豆之所也라蓋先生이以大賢之姿로稟嶽降之精하 야 宗孔朱之道義하고承栗沙之嫡傳하야其學問造大節雄文이無一不足而山斗乎儒門하고蓍龜於廟堂하야實有吾東方無窮之惠矣라逮
明陵己巳에不幸爲 凶所陷하야旣圍籍耽羅라각?줬?命禁山이러니六年後甲戌에國政更新하야 伸寃復官하고 建考巖書院하야御筆四大字而額之하니各處院享이因此爲之兆則考巖은乃宋子之首院也오大院也라 建陵己巳에配之以首弟文純公遂菴權先生하다至 洪陵初服에未免混人於大同毁撤則寂寞馬荒廢馬歷再周甲矣라後學之茹痛 恨이爲何如哉아何幸天道好還에文運載回하야光復後己巳庚午辛未壬申癸酉五載之間에公議謀復하야 樂出誠金하고 井州市長趙明根道議員鞠承 井州市長李淀圭가慕賢誠功하야以文化財로大發國庫하야本院三間講堂四間神門三間이輝煌突兀 하야一新耳目하고奉牌禮成하니宿願始伸하고士氣益張이라雖然이나凡遠近儒生之出入於斯者는 勿以是自滿하고春秋尊幣朔望焚香之餘에聚精會神하고勵志奮氣하야讀先生之大某하고講先生之春秋하야服膺勿先하고淑身進德하야期不墜明天理正人心之遺旨則方可謂先生之徒而今日復院之本意也라勉之哉어다 是役也倡自井州鄕校儒林而四方互應하고 余亦學金友仁煥安永敦으로 始終專力하야 閱風波喫辛若而告功云爾라系之銘曰 考亭之後巖句는朱宋道統大深刻이라自古公論久己定하니後人莫敢生疑惑이라宗廟百官富且美하니論著發揮世無敵이라廢墟重建多感想하니鞏固維支 千億이라


本院創建 三百四十年 癸酉 九月 日
後學 扶安 金 炯 觀 謹撰
後學 慶州 金 權 鎭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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